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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꽃나무에 안부를 묻다.

-고해자-

계절마저 비켜선 황량한 내 방에 기적처럼 가을이 들어와 앉아 있다.
종달리 해안가를 다녀오다 꺾어온 노란 열매 줄기. 젖은 얼굴로 덜썩 주저앉은 화장대 앞, 이제 쉰의 나이를 앞둔 주름진 내 모습 옆으로, 고즈넉한 가을의 얼굴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만추의 들녘, 바다를 배경으로 한 그 벌판의 얼크러진 덤불 속에서 노란 구슬을 매단 나무는 마치 여인의 목에 두르고 있는 보석처럼 영롱했다. 혹시 열매들이 떨어져 버릴까 조심스레 줄기를 꺾다, 전류처럼 흐르는 내 삶의 지난함에 눈시울이 젖곤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괜스레 텅 빈 하늘만 올려다 본 기억이 떠오른다.
이름도 모르는 노란 열매가 가끔 상념에 젖어들게 한다. 한 알 한 알 가녀린 줄기에 방점을 찍듯 열매를 매달았을 나무를 생각하다 얼기설기 살아온 내 이력을 반추하게 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기나 한가. 살아있는 것들의 운명은 얼마나 허무한가. 붙잡고 싶은 것들과 간직하고 싶은 것들은 왜 그렇게 쉬 사라지고 마는지. 한줌 흙으로 돌아가고 말 생인 것을 아둥바둥 살아가게 되는지. 자연의 도도한 흐름을 거역할 수 없듯 떠날 때가 되면 떠나야 하는데, 왜 사소한 것들에 소진하고 있는 것인지.
요즘 산행 길에선 유독 빈가지로 서 있는 것들에 눈길이 더 머문다. 마지막 잎새마저도 다소곳이 대지 위로 부려놓은 모습에 겸허해진다. 말없이 떠난 이에 대한 아픔, 그리움이 깊어서일까. 스치는 가지마다 못다 하고 떠난 안부인사 하듯 떨리는 손 내미는 것 같다.
가을의 여정은 화장대 앞에 머물러 있지만, 한 편으로는 누군가가 남겨두고 간 가을을 훔쳐온 것만 같아 맘이 그다지 편치만은 않다. 돌아오는 차 안에선 그 열매들에 눈을 맞추며, 그 숫자 만큼에 지난 시간들을 꿰어 본다. 건성건성 살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보며 남은 시간만큼은 촘촘히 매달린 열매처럼 치열하게 살아가기로 한다.
하룻밤 새, 노란 열매의 모습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자체만으로도 고운 열매가 세 갈래로 벌어져 드러낸 속살은 빨간 씨앗 세 알을 품고 있는 게 아닌가. 진한 향기라도 품었음직한 그것들은 빨간 속마음까지 열어 보였다. 누군가가 이 가을 내게 특별히 부쳐준 선물 같기만 하다. 마주하고 있노라니 쉬이 마음을 열어 보이며 먼저 인사를 건네 온다. 그들에게 눈웃음으로 화답한다.
문득 지난 여름 홍도 나들이 길, 동행 해준 친구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친구와의 첫 만남은 작년에 그녀가 제주의 동창들을 찾아왔을 때였다. 객지에 살다보니 동창들에 대한 생각이 간절했다고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던 그녀. 유년의 추억만이 전부였던……. 광주 사람이 다 되어버린 친구는 그동안의 격조했던 세월을 좁히는데도 재간이 있어, 금새 소꿉시절로 되돌려 놓았다.
그 후 간간이 전화 통화만 오가던 터라, 마중차 역으로 서둘러 나오게 한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뿐인데, 도리어 보자마자 특유의 너스레로 우리를 반겼다. 그리곤 우리에게 곰삭은 광주의 맛을 저녁으로 대접했고, 선뜻 방을 내주며 다음날의 길라잡이까지 자처하는 것 아닌가.
아침에 눈을 떠보니 전날 모두 잠을 설쳤는데도 친구는 청국장을 뜬다고 혼자 부산스러웠다. 갈무리 즈음 미리 준비해둔 아이스박스에 드라이아이스와 청국장 통을 넣어주며, 제주에 가면 곧바로 냉장고에 넣으라고 당부마저 한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청국장 뜨는 날짜까지 나의 여정에 맞췄던 친구. 아무리 집에 방이 남아돈다 한들 나라면 쉬이 방을 내줄 수 있었을까. 아직도 미안함과 고마움이 내
드문드문 보내주는 문자와 전화로 또 다른 삶의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영혼까지 맑게 해주는 친구가 있어 내 마음에 기쁨으로 번진다. 친구의 마음을 반이나마 닮아갈 수 있도록 애써야 하겠다.
노란 꽃나무 열매가 빚어내는 가을의 서정으로 내 방은 오늘도 따뜻함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노란 꽃나무 열매 너머로 광주 친구의 넉넉한 얼굴이 부처님의 원광처럼 포근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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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깊은 혜량과 언어의 조탁을 기대하며"

사람들의 심전은 다영한 작물들로 무성하다.
'희노애락애오욕'으로 대표되는 감정이란 이름의 오곡백과가 시간이란 자양을 흡입하여 알알이 영글어 간다.
그리하여 더 이상 심전의 용량이 그 열매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때 문학동네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인 열매들을 수확하여 문학이란 소담한 그릇에 담아 세상에 내어 놓는다.
장르라는 문학의 그릇들 역시 다양하다.
시라는 그릇은 운율에 의탁한 정서를 담기에 안성맞춤이고, 서사는 아무래도 소설이란 그릇에 담을 때 훨씬 맛깔스럽다. 영혼을 건 대화들은 희곡이란 그릇이 제격이고, 문학동네 수확물들의 품평은 평론이란 투명한 그릇에 담을 때 훨씬 신뢰가 간다.
특히 수필은 오지랖 넓은 이웃사람과 같아 사람들과 가장 친숙한 그릇이다.
시와 소설, 희곡, 평론의 내용물들까지도 거침없이 담을 수 있기에 많은 사람달이 이 그릇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최종심에 오른 네 분의 목소리에는 연륜의 향기가 가득했다.
하여 박모니카, 고경실, 고해자,황인숙님의 체취를 흠향하며, 모처럼 수필문학의 열린 지평을 오래도록 응시할 수 있었다.
어렵사리 고해자님과 고경실님의 작품에 방점을 찍었다.
산산한 삶 속에서도 노란 꽃나무를 통해 친구와의 우정을 길어 올리는 솜씨가 뛰어났고, 50대의 중반을 지나며 지난 삶의 반추하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아름다웠다.
삶에 대한 더 깊은 혜량과 언어의 조탁이 더해진다면 두 사람의 뛰어난 수필가가 탄생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심사위원 고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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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늘 무언가 모자란 듯함으로 지내온 시간들……
겨울의 한가운데서 봄을 준비하는 겨울나무를 떠올려 봅니다.
머지않아 봄을 마중할 꽃나무처럼 소리 없는 그 부지런함을 닮고 싶습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피우는 꽃처럼……
살아가는 게 힘들고 지칠 때 마다, 늘 주위에 좋은 이웃들이 함께 해주었기에 행복했습니다.
어제의 평범한 날들이 더 새롭게 느껴짐을 숨기기 어려운 오늘입니다.
새로 난 길로 들어설 - 내게 주어진 특별한 날임을 확인하는 순간, 모든 것이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주어진 삶을 더 사랑하며 진지하게 살아가라는, 값진 보너스를 얻은 것만 같습니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건강함이 있음에도 무심히 지내온 시간들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모자란 글 뽑아주신 여러분들께 거듭 감사함을 전합니다.
더 열심히 공부하라는 채찍으로 알고 정진하겠습니다.
모두들 삶이 고단하다고 하는 요즈음.
어디에서든 함께 하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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