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간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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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故 현승준 선생님의 배우자입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여섯 달이 넘었지만, 저는 여전히 그날의 충격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재운 뒤 찾아오는 정적 속에서, 늘 곁에 있던 남편의 부재를 실감할 때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숨이 막히는 듯한 고통을 느낍니다.

이 글은 단순히 남편의 마지막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20여 년 동안 교사라는 이름 하나로 성실히 살아온 한 사람이, 어떻게 과중한 업무와 끝없는 민원 속에서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증언하고자 합니다. 이는 제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 그가 남긴 교사로서의 명예를 반드시 회복하기 위한 절절한 호소입니다.

남편은 제주중학교에서만 20여년을 근무해오며, 학교 일과가 끝나면 집으로 와 아이들의 식사와 학원 준비를 챙긴 뒤, 낮에 처리하지 못한 업무를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학교로 향하곤 했습니다.

쉬는 날에도 학교에 나갔으며, 초과근무 수당조차 올리지 않고 묵묵히 책임감 있게 일을 했습니다. 제가 종종 “학교에 사람이 그렇게 없어요? 왜 일을 혼자 다 해요? 좀 쉬엄쉬엄해요.”라고 농담 섞인 말투로 이야기한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교사의 역할은 결국 학생을 바르게 이끄는 것”이라고 말하며 늘 아이들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 사랑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이어졌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원을 못 다니는 학생들을 따로 불러 지도하고, 힘든 학생이 있으면 먼저 손을 내밀었으며, 어려움에 처한 동료 교사가 있으면 함께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절대 학생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끌어주려 노력하는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사였습니다. 과학 선생님이자 3학년 부장으로 대회가 있으면 밤, 주말, 휴일을 가리지 않고 과학 동아리 학생들도 지도하고, 학년의 학생들 생활지도 역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3학년 부장으로써 학부모 설명회와 현장체험학습, 졸업앨범 촬영 업무 등 정말 하루도 편히 쉬는 날 없이 열심히 일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미루거나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성격에 많은 업무가 있고 민원이 있어도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요청하기 어려웠습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보다 학교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그 모든 선택은 학교와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내로서 남편이 그 모든 시간을 얼마나 진심으로 애써왔는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남편은 학생, 학부모, 동료 교사들과 더 잘 소통하기 위해서도 노력했습니다. 밤늦게 제자들에게 문제풀이 질문이 와도 귀찮아하는 법이 없었고, 하던 일을 멈추고 친절하게 답해주었습니다. 과학 지식에 대한 지도뿐만 아니라 생활지도, 진로 상담까지 아이들의 내일을 함께 그려가려 애쓴 사람이었습니다. 방학 중에도 학부모들에게 먼저 안부를 전하고, 시험 기간에는 학생들을 격려하며 늘 곁을 지켰습니다. 졸업해 성인이 된 제자들도 해마다 남편을 찾아와 인사를 했고, 남편은 그것을 교사로서 삶의 가장 큰 보람과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남편은 13년 전 1년간 집요한 악성 민원에 시달린 적이 있었습니다.

비슷한 악성 민원을 겪은 다른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런 일은 시간이 지나도 절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잠시 잊은 듯 지내다가도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그 기억이 되살아나며 극도의 불안이 엄습한다고 합니다. 남편 역시 그 사건으로 인해 깊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았으며, 이후 유사한 민원이나 사건을 겪을 때마다 그 고통이 되살아나 더욱 힘들어했습니다.

올해 남편은 또다시 3년 연속 학년부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저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잘해야 본전인 그 일을 왜 또 맡았냐고 걱정했지만, 남편은 “선생님들 전출이 많아서 그렇게 되었다.”며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근과 주말 근무 횟수는 줄지 않았으며, 제가 쉬라고 해도 낮에 수업 등으로 다 하지 못한 업무를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학교로 향하곤 했습니다.

2025년 3월 개학 이후 한 학생의 문제로 새로운 어려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학생은 무단결석이 잦았고, 남편은 그때부터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남편은 학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결석으로 처리하면 안 돼?”, 제가 묻자 남편은 “아이 그래도 생기부에 남잖아. 내가 선생님인데 할 수 있는 만큼 해줘야지.”라며 끝까지 책임을 다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학생의 잦은 결석으로 학생의 누나와 통화가 잦아졌고, 남편은 집에서도 그 문제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학생의 누나는 퇴근 후, 밤 늦은 시간까지 수없이 전화를 걸어 몰아세웠고, 남편의 손에 쥐어진 휴대폰은 공포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그 압박은 일요일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교육청에 민원을 접수한 뒤에도 5차례에 걸쳐 전화를 걸어왔고, 남편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습니다. 교사라는 직업 특성상 학생과 학부모와 얽힌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으며, 남편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극심한 무력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5월 어느날 학생은 발목을 다쳤다며 남편에게 학교를 쉬겠다고 카톡을 보냈습니다. 남편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병원에 갔다 오라”고 당부했지만, 학생은 연락 없이 등교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학생의 누나는 남편에게 연락했고, 12시까지 등교하지 않으면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12시 24분 학생이 등교하지 않았다고 연락했고, 15시 33분 누나가 다시 연락했을 때는 수업 중이어서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통화에서 남편의 말로는 학생의 누나는 남편의 말을 믿지 않고 동생의 말만 믿으며 본인을 일방적으로 학생을 혼낸 것처럼 알고 있어서 언성이 오갔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다른 동료 교사들 말에 따르면, 해당 학생은 잦은 무단결석과 담배 사건에도 불구하고 누나에게는 자신이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남편이 일방적으로 훈계했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당시 남편은 이미 건강 악화로 예민해져 있었는데, 이 같은 상황은 그에게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습니다.

남편이 여전히 충격과 절망 속에 있을 때, 학생의 누나는 남편을 교육청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짐작하건대 이때부터 남편은 상당한 패닉 상태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진심 어린 노력이 외면당하고 보호자에게 오해를 받는 상황, 그리고 교사로서의 명예뿐 아니라 학교의 명예까지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날 저녁 7시경 병원에서 종기 치료를 받고 돌아온 남편은, 밤 8시가 넘은 시각에 학생의 누나로부터 연이어 다섯 차례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때 누나는 조롱하듯 “교육청에 민원 글 넣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통화를 마친 남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고 한참 동안을 움직이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 표정은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완전히 무너진 사람의 표정이었습니다. 평소 저와 아이들 앞에서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던 남편이었기에, 저 역시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몰아세우며 퇴근한 저녁시간부터 휴일인 일요일까지 담임선생님에게 수차례 전화로 괴롭히고 조롱하는 문자 태도, 학교로 오겠다고 하고서는 기다린 사람은 생각하지도 않으며 약속을 이렇게 제멋대로 지키지 않는 것만 보더라도 평소 학교와 교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인성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옆에서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며 보다 못한 제가 말했습니다. “여보, 저 사람들 그냥 시비 거는 거야. 당신만 힘드니까 그냥 미안하다고 하고 빨리 마무리 지어요.” 저 역시 민원이 얼마나 무섭고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남편은 결국 밤 9시가 넘어 사과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 문자는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 학교에 나오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아파서 못 오게 되면 미리 연락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문자를 보내는 남편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학생의 누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학생에게도 “누나가 있으니 누나 말 잘 들으면 잘 될꺼다, 잘 자고 내일 보자”며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 학생도 마찬가지로 답신조차 하지 않았고, 한동안 아무 연락도 없이 등교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5월 18일(일) 오후에 학생의 어머니에게서 13분 가까운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금요일 12차례의 통화 이후로 남편의 사과 문자에도 연락이 없던 가족들이었기에 남편은 그것을 화해의 제스처로 받아들여 통화를 했습니다. 해당 통화는 김유민 어머니의 녹음 기능이 있는 전화로 12분 56초간 이루어졌으며, 사건 담당 경위에게 음성파일을 문의했지만 김유민 어머니의 통화 내역은 삭제되어 있었고, 두 차례의 포렌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본인들에게 불리한 내용이었기에 삭제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남편의 수차례 사과 문자에도 반응이 없으면서 교사의 실수 하나를 트집잡아 물고 늘어지며 교육청에 신고, 수차례 전화, 문자로는 괴롭히면서 정작 동생의 흡연문제, 말도 없이 연이어 며칠간을 무단결석을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의 태도도 없었습니다.

이 무렵 남편은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겨드랑이에 림프절 염증이 생겨 종기가 났고, 5월 4일부터 사망 당일까지 십여 차례 병원 진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병가를 내고 쉬어야 할 상황이었지만 그는 업무에 대한 책임감으로 퇴근 후에야 병원을 찾아 수술과 치료를 받아왔습니다. 안 그래도 과중한 업무로 힘든 상황에서, 학생 문제로 이어진 극심한 스트레스가 남편의 몸마저 버티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민원이라는 말을 들은 그날 이후 남편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습니다. 학생 누나의 전화는 저희 가족의 주말을 송두리째 빼앗았습니다. 아이들과 놀다가도 멍하니 앉아 있거나, 겨우 잠자리에 누워도 “머리가 너무 아프다. 누우면 오히려 오만 가지 생각이 든다.”며 집 밖으로 나갔다 오기를 반복했습니다. 주말 내내 남편은 전전긍긍하며 불안해했고, 저 역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괴로웠습니다.

5월 19일 월요일, 학교 체육대회 날이었습니다. 전날 학생의 누나가 학교에 방문하겠다 하여 남편은 교장에게 교육청 민원 사실과 학생 누나가 학교에 오기로 한 사실을 보고했지만, 교장은 남편을 질타했고 “행사 끝나고 얘기하자.”며 상황을 미뤘습니다. 그리고 교육청 조사 의하면 학생의 누나는 그 순간에도 교육청에 전화를 걸어 민원 처리가 늦다며 담당자를 닦달했다고 합니다. 학교 뿐만이 아니라 지역 교육청, 담당 장학사, 민원실 등 모든 곳에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수치스러워했고 저에게는 감봉될 것 같다며 처벌을 걱정했고 이는 압박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그날 점심, 남편은 동료 교사에게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 학생들이 너무 싫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오후에는 학년부장으로 다른 학급 흡연 학생을 훈계하는 과정에서 없어진 담배가 어딨는지 묻는 질문에 해당 학생이 “그건 CCTV 돌려서 선생님이 찾아보셔야죠.”라는 조롱 섞인 대답을 해 또다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른반 학생들의 흡연문제까지 오롯이 남편의 업무였고 그래서인지 5월 19일(월) 그날 저녁에는 교무부장님께 전화를 걸어 “머리가 너무 아파서 2주 정도 병가를 쓰고 싶다.”고 호소했지만, 교감선생님은 “지금 병가를 가게 되면 빌미가 될 수 있으니 학생 건 해결하고 병가 가자.”며 사실상 거절했습니다. 실질적인 보호는 없었고, 남편은 13년 전 시달렸던 악성민원 사건 때와 똑같이 또다시 홀로 도움조차 받지 못한 채 사지로 내몰리고 있었습니다.

잦은 결석에 담배피는 학생을 지도하는게 교사의 업무인데 민원으로 돌아와 교장실에 두 번을 불려갔을 때 얼마나 치욕스러웠을까요? 자신의 편에 서서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는 상황과 병가신청조차 민원을 처리하고 가라고 하여 쓸 수 없었던 상황이 얼마나 절망스러웠을지 짐작도 안됩니다.

월요일부터 오기로 한 민원인은 연락도 없이 오지 않았고 화요일 퇴근 무렵남편은 다시 한번 사과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3분 뒤 돌아온 답장은 “얼마나 선생님이 싫었으면 학교 가기 싫다고 했겠느냐, 알아서 벌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문자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 5시 26분, 남편은 마트에서 부탄가스와 숯을 구입했습니다. 누나의 문자로 인해 한계에 다다랐던 것 같습니다. 힘이 없이 무기력하게 있는 남편을 보며 힘든게 있으면 이야기하라는 저에게 남편은 “괜찮아, 이제 조금만 참으면 될거야”라는 남편의 말, 하지만 저는 느꼈습니다. 그 ‘조금만’이 얼마나 무거운 시간이었는지를... 남편은 극도의 스트레스로 며칠째 잠을 못 자고 식사조차 거른채 두통까지 시달리며 신경 쇠약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5월 21일 악몽같은 수요일, 저는 그날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남편은 아침에도 평소처럼 학생에게 등교를 독려하는 카톡을 보냈지만, 학생은 무단결석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남편은 점점 더 깊은 고통에 빠졌습니다. 두통을 호소하며 괴로워했고 잠도 못 자고 며칠째 식사도 제대로 못하며 정신적으로도 매우 지쳐 있었지만 남편에 대한 실질적인 보호는 없었습니다.

남편은 퇴근 후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집에 들렀습니다. 잠시라도 마지막을 우리 곁에 머물고 싶었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미어집니다. 오후 5시가 넘어 저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왔는데 없네? 나 병원에 갔다가 바로 학교로 가서 남은 일 하고 오겠다고 하며 카드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미 모든 희망을 놓아버린 듯한 목소리였습니다. 이때라도 알아차리고 옆에 있을 걸 너무도 후회가 됩니다. “집 금방 도착이니 밥 얼른 먹고 가라”는 제 말에도 이미 마음을 굳힌 듯, 할 업무들이 많다며 다시 학교로 향했습니다. 그 평범한 대화가 우리의 마지막이 될 줄 몰랐습니다. 토끼같은 아이들, 사랑하는 가족들을 뒤로 한 채 집을 나서야 했던 그 결심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그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 글을 쓰다 보니, 남편의 그 마음이 느껴져 눈물이 멈추지 않습니다.

밤 10시가 넘도록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불안한 마음에 남편의 학교로 달려갔고, 교무실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발견하고서야 직감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 남편은 결코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20년간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교사였습니다. 그러나 13년 전 겪었던 악성민원의 트라우마는 남편을 오랫동안 병들게 했고, 올해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었을 때 학교마저 남편을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남편은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얼마나 괴로웠으면 삶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린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개인의 선택이 아닌, 명백한 사회적 타살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을 옆에서 지켜본 저로서는 남편을 끝내 죽음까지 몰고 간 민원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그것을 멈출 수 있었을지 끝없이 다시 생각하고 후회하게 만들었던 너무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남편이 퇴근 후에도 지속적으로 걸려오는 학생 누나와 엄마의 전화를 안 받았더라면,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어렵게 학교에 말했을 때 병가를 쓸 수 있었더라면, 교육청으로 민원이 들어갔을 때 남편 혼자만 끙끙 앓는게 아니라 누군가가 같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더라면 지금 남편은 저와 아이들 곁에 계속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5월 19일(월) 오기로 한 민원인과 교장선생님께서는 왜 못 만났는지, 20일(화) 교장선생님과 학생 누나가 통화하고 난 뒤 업무로 바빠 남편과 만나지 못했다면 교내 메신저를 통해서라도 상황을 알리고 이때라도 남편을 분리시켜 병가를 사용하게 했어야 맞는 것 아닌지, 이 골든타임을 놓친 것은 아닌지 전 이 모든 상황들이 아쉽기만 합니다.

학생과 학부모가 학교 선생님들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정당한 방법으로 요구해야 합니다. 저희 남편은 잦은 무단결석으로 등교 문제와 흡연 문제로 졸업을 못 하게 될까 염려하며 3학년 담임으로써 책임감을 가지고 생활지도 과정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녁 시간, 주말에도 반복적으로 부당한 민원 전화를 피할 길은 없었고 개인 휴대폰으로 장시간의 민원을 반복적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마저 교사로서는 심히 견디기 힘든 내용들을 반복적으로 홀로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신이 너무나 괴로워 빨리 민원을 처리하고자 죄송하다는 말을 여러 번 전하였고 학교로 학생을 등교시키고 민원인이 방문하여 해결하고자 수차례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민원은 처리되지 못했고 그렇게 자신을 아끼지 않고 학교, 학생들에게 헌신하며 20년간 교직생활을 살아온 사람이기에 진실이 왜곡되고 오해받게 되는 것을 견디다 못해 20년간 몸담았던 학교에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수많은 동료 교사와 학생들이 찾아와 추모하며 “현승준 선생님은 누구보다 학생을 위했던 교사였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습니다. 그만큼 남편은 학생들과 동료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도와 학교, 관리자, 그 무엇도 그를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이후 남편이 떠나고 남겨진 저와 어린 두 자녀는 슬픔과 충격으로 지금까지 정신의학과 상담과 심리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아직 초등학생인 어린 두 아이들을 저 혼자 키워나가야 하기가 막막하고 어린 초등학생 두 자녀는 저마저 세상을 떠날까봐 불안해하며 엄마가 조금이라도 안 보이면 “엄마도 죽으러 가는거 아니죠? 엄마까지 없으면 저희 정말 큰일나요.” 하며 불안해합니다. 제가 장거리 출퇴근이다 보니 교통사고라도 날까 봐 전전긍긍하며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제 차를 따라 타기도 합니다. 조금만 연락이 안 되어도 부재중 몇 통이 걸려옵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방관한 교육청, 교장, 교감, 악성민원인 김유민, 김유민누나)는 없이 경찰발표가 나는 것이 억울합니다, 유가족을 위한 배려도, 제대로 된 진상조사도 하지 않는 교육청이 원망스럽습니다.

학교 밖에 개인적인 삶이 없었던 학교와 집밖에 모르던 남편은 그렇게 본인 삶의 마지막도 학교에서 끝을 맺었습니다.

부디 제 남편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혀주시고, 남편이 억울하지 않게 마지막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2025년 11월 25일

故 현승준선생님의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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