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59

나 어른이 되면

-고경실-

지금도 떠올릴 때마다 가슴 더워오는 추억의 노래가 있다.
유년의 동구길을 짓까불며 오가면서 부르던 동요들. 그 중에서도 ‘나 어른이 되면’이라는 노래이다.
홍진의 더께가 묻지 않아 하얀 광목빛처럼 눈부셨던 그 순진무구했던 날들.
어른들의 오염된 가치와 일탈된 행동들에 실망한 나머지 도리질을 하며, 어른이 되면 주변의 어른들을 반면교사 삼아 어른다운 어른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며 목청을 높여 그 노래를 불렀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 좁은 시야 탓인지 내 주위에 어른다운 어른은 없었다.
비록 머리에 하얀 서리 내리고 얼굴의 검버섯들이 그 동안 어른들을 스쳐지나갔던 세월의 무게를 증거하고 있었지만, 내 이상형의 어른들은 찾을 길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빨리 내 몸의 나이테가 더해지기를 갈망했고, 그 만큼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진정으로 보살펴 주는 자상하고 넉넉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유독 텅 빈 집에서 혼자 지내야했던 날들이 많았던 그 시절. 학교가 파하고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어머니를 부르며 들어서지만 집안은 거의 텅 빈 폐가처럼 을씨년스럽게 나를 멀뚱하게 맞았다.
결국 혼자 고개를 떨구고 책가방을 내던지고 부엌으로 들어가 솥단지를 열면 찐 고구마 몇 알만이 오도마니 누워있었고, 그 때마다 허연 버짐이 얼굴에 가득했던 남루한 나의 유년은 목이 메일까 냉수를 들이키며 고구마의 노란 속살에 코를 박기 일쑤였다. 그렇지만 배 속에 아귀가 들었는지 나의 허기는 도무지 회복될 줄을 몰랐고, 결국 부엌을 나와 나처럼 허기로 충혈된 동무들과 먹을 만한 것들을 찾
그 때는 몰랐다. 일터인 밭과 바다에서 삶의 뿌리를 캐느라 주린 배를 움켜잡고 있었던 부모님들의 고통을 몰랐다.
오히려 항상 집을 비우고 물오이처럼 커야할 자식의 먹거리조차 변변히 챙겨주지 못하는 부모님들의 무책임에 눈을 흘기며, 내가 어른이 되면 내 아이들 만큼은 배불리 먹이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길거리에서 멱살잡이를 하고, 술이 취해 주사를 부리는 어른들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 혐오감을 주었다.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손가락질 받을 일을 일삼는 어른들을 보며 어른이 되면 일적불음(一滴不飮)을 맹세했고 무엇보다 이웃들을 사랑하며 오순도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역시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몰랐고 술을 권하는 서민들의 팍팍한 삶을 그 때는 까마득히 몰랐기 때문이었다.
세월의 물살에 쓸리다 보니 이제 나도 어른이 되었다.
가장으로서 가정을 꾸리고, 사회 구성원의 당당한 일원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의 내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어느덧 지천명(知天命)의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싶은 부끄러움에 처연함을 숨기지 못한다. 유년의 그 날. 나 어른이 되면을 호기롭게 부르며 꿈꾸었던 내 미래의 자화상은 어디로 갔는가. 대신 그 옛날의 그토록 혐오했던 어른들을 꼭 닮은 얼굴이 거울 속에서 부끄러움에 어찌할 줄 몰라 한다.
직장생활을 핑계 삼아 아이들과 오붓한 시간 한 번 갖지 못하는 무책임한 가장의 얼굴. 삶의 정도를 일탈하기를 밥먹듯하면서도 그럴 듯한 변명과 자기 기만으로 일관하는 뻔뻔한 중년의 얼굴. 이웃에 대한 배려는 고사하고 아집과 이기로 끝내 다른 사람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며 희희낙락하는, 후안무치의 어른이 오늘 바로 내 자신이 모습이라는 것을 확인해야 하는 아픔 때문이다.
만시지탄의 중년. 그렇지만 후회와 번민으로 보내기에 나의 여생은 넉넉하지 않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내가 꿈꾸던 어른의 정도를 걸어가 보아야 하겠다.
집안의 행복과 평화를 지탱하는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다.
평생의 반려인 아내와의 사랑을 회복하고, 아이들에게 자상한 아버지로 거듭나야 하겠다.
주변의 불우한 아이들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건네주고 그들에게 드리워진 불행의 그늘을 걷어낼 한 줌 햇살 같은 도움의 여지가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베풀어야 하겠다.
남들보다 더 많은 부를 갖기 위해,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남들에게 딴지를 걸며 아등바등했던 지난 날의 소승적 사고와 가치를 벗어 던지고, 이웃들과의 아름다운 동행을 통해 더불어 사는 마음 따뜻한 어른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다.
무엇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채색해야 하겠다.
이 땅에 태어난 것에 감사하고, 내 몸을 키워준 자연에 감사해야 하겠다.
사람이란 지위와 사회적 지위를 마련해준 부모님과 고마우신 분들에 대한 보은을 하나하나 실천해야 하겠다.
비록 보잘 것없는 초동급부지만 나로 인해 내 가족과 이웃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뜻 깊은 인생이 되겠는가.
시나브로 일몰에 젖어드는 창가에 앉아 망연히 정원을 내다보는데, 차가운 초겨울 한천(寒天)을 이고 있는 동백나무에서 핏빛 동백꽃 몇 송이 소리없이 진다.
나도 머지 않아 이 세상이란 나무에서 너울같이 쓰고 있는 세상의 명리(名利) 다 벗어던진 전라(全裸)의 몸으로 홀로 낙하해야 하겠지.
세상에 나와 실존의 의미 하나 남기지 못한 채, 허무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결별해야 하겠지.
상념이 이어지며 눈시울이 젖어 오는데 문득 아내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돌려 세웠다.
‘집에 계실 때 마당이라도 한 번 쓸어 주면 어디가 덧난답디까?’
평소 아내의 거듭되는 지청구에도 게으른 암소처럼 뭉기적 거리던 내가 빗자루를 찾아들고 마당으로 나서자, 오히려 놀라 크게 벌어진 아내의 눈동자에 붉은 노을빛이 가득하다.

----------------------------------------

심사평
"깊은 혜량과 언어의 조탁을 기대하며"

사람들의 심전은 다영한 작물들로 무성하다.
'희노애락애오욕'으로 대표되는 감정이란 이름의 오곡백과가 시간이란 자양을 흡입하여 알알이 영글어 간다.
그리하여 더 이상 심전의 용량이 그 열매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때 문학동네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인 열매들을 수확하여 문학이란 소담한 그릇에 담아 세상에 내어 놓는다.
장르라는 문학의 그릇들 역시 다양하다.
시라는 그릇은 운율에 의탁한 정서를 담기에 안성맞춤이고, 서사는 아무래도 소설이란 그릇에 담을 때 훨씬 맛깔스럽다. 영혼을 건 대화들은 희곡이란 그릇이 제격이고, 문학동네 수확물들의 품평은 평론이란 투명한 그릇에 담을 때 훨씬 신뢰가 간다.
특히 수필은 오지랖 넓은 이웃사람과 같아 사람들과 가장 친숙한 그릇이다.
시와 소설, 희곡, 평론의 내용물들까지도 거침없이 담을 수 있기에 많은 사람달이 이 그릇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최종심에 오른 네 분의 목소리에는 연륜의 향기가 가득했다.
하여 박모니카, 고경실, 고해자,황인숙님의 체취를 흠향하며, 모처럼 수필문학의 열린 지평을 오래도록 응시할 수 있었다.
어렵사리 고해자님과 고경실님의 작품에 방점을 찍었다.
산산한 삶 속에서도 노란 꽃나무를 통해 친구와의 우정을 길어 올리는 솜씨가 뛰어났고, 50대의 중반을 지나며 지난 삶의 반추하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아름다웠다.
삶에 대한 더 깊은 혜량과 언어의 조탁이 더해진다면 두 사람의 뛰어난 수필가가 탄생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심사위원 고권일>

------------------------------------------

 

당선 소감

오늘따라 잿빛 하늘이 을씨년스럽게 다가온다. 택시를 타고 출근하면서 벚꽃나무 가로수 잎이 바닥을 쓸며 달려드는 것이,내게 파도처럼 느껴진다.
지난해 수원시에서 혼자 거닐던 생각이 떠오른다.
가끔씩은 내가 혼자임을 처절하게 느낄 때가 있다. 수원에서 교육을 받던 1년동안 어떻게 살 것이냐 라는 이런 저런 생각에 긁적거렸던 원고를 영주일보 신춘문예 모집에 접수하고는 일상에 쫓겨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더니 전혀 모른 핸드폰이 울리더니만 당선소감을 적어 보내달라고 한다.
새식시처럼 수줍다. 또 세간에 무슨 소리를 들을 것인가.
어떤 이유로든 이름이 거명될 때면 몸에서 땀이 스르르 배어나는 경험을 자주하기 때문이다.
원래 전문적인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아마추어인 나에게는 이것 또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공인으로 살아가면서 발 한자국이나 목소리 하나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어서 내가 봐도 참 딱할 때가 있다.
내가 사는 삶이 자유롭게 허공을 날을 수는 없을까.
요즘 나는 스티브 잡스나 리처드 브렌슨과 같은 사람을 야성적 경영자로, 피터 드러거와 같은 사람을 지성적 경영자로 나누어 생각할 때가 있다.
『지와 사랑』에서 어쩌면 야성과 애욕을 승화시킨 골문트와 지와 영감을 상징하는 나르치스를 나누어 생각 하듯이 이런 비교를 해보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창조적일까.
어떤 것이 가치 있는 삶일까.
가슴 한 자락이 찡하다.
성큼 넘어가고 있는 겨울, 내 아내를 더욱 사랑해야겠다.

주소 : 제주시 도남동 900-52
연락처 : 010-5428-5410
 

일간제주의 모든 기사에 대해 반론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됩니다.
반론할 내용이 있으시면 news@ilganjeju.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이와 더불어 각종 비리와 사건사고, 그리고 각종 생활 속 미담 등 알릴수 있는 내용도 보내주시면
소중한 정보로 활용토록 하겠습니다.
저작권자 © 일간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