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재=그들은 쌀밥을 먹는다고 선전했지만 얼굴에 핏기가 없더군요. 주민들과의 접촉은 금지되어 식생활을 자세히 관찰할 수 없었지만 실제로는 쌀밥에 고기반찬을 못먹는 것 같아요. 우리들이 드나드는 식당과 일반식당 사이엔 베니어판으로 막아 놓았는 데 뚫린 구멍으로 들여다 봤더니 일반주민들의 밥은 우리에게 주는 것과 아주 딴판이에요. 그들은 고구마가 섞인 잡곡밥이더군요.
엄동=우리에게 주는 쌀밥도 말이 쌀밥이지 기름기가 없고 푸실푸실하며 새카만데다 맛도 없어요.
우재=우리가 평양여관에서 배구를 하고 있는데 어린 학생들이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었읍니다. 우리들중의 한명이 한 학생의 도시락을 슬쩍 열어보았지요. 저도 곁눈질로 들여다봤지요. 쌀은 한톨도 없고 옥수수로 지은 밥이었읍니다. 도시락을 몰래 열어본 동료는 즉시 끌려가 우리 일행이 석방될 때까지 다시 나타나지 않았읍니다.
사회=북한주민의 의복은 어떻습니까?
최성=제가 묵고 있던 여관의 안내원들은 옥양목이나 모시저고리를 입었더군요.고무신은 도저히 볼 수 없고 모두 비닐신을 신고 있었읍니다. 비닐신은 딱딱해보였고 부러진 자국도 있었읍니다.
사회=평양시가와 건물들은 어떻습니까?
최해=평양시는 크기가 강릉시와 비슷했읍니다. 건물은 대개 4,5층으로 네모 반듯해 퍽 단조로왔읍니다. 가장 높은 건물은 아동궁전이라고 하는 건물로 11층이더군요. 거리의 풍경은 퍽 쓸쓸했고 행인들은 우리들이 납북어부들이란 것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고 몰라보는 사람도 있었읍니다.
우재= ...... 돌아오기 전날밤 저는 쉐터와 구두를 잃어버렸읍니다. 북한에는 옷이 귀하니까 누가 훔쳐간 것 같아요.
우리 물건 굉장히 탐내
최해=그들은 남한의 물건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우리들이 입고 간 털옷을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더군요. 또 날짜가 나오는 시계를 보더니 욕심을 내더군요. 이런 시계를 남한에서 생산한다고 했더니 거짓말이라고 하더군요. 사상교육 교관들이 매시간 바뀌는데 차고 오는 시계는 항상 같은 모양이에요. 시계 어쨌든 교대로 차고 오는 것 같아요. 어쨌든 북한에는 시계가 귀한 모양입니다.
우재=동해안에 와 보니 우리배에 발동을 걸어 놓았더군요. 주위엔 환송객들이 많이 나와 우리들을 에워싸고 있었어요.60 정도의 노인들은 악수를 청하거나 붙들며 울더군요. 그런데 30대 미만의 젊은 사람들은 동정하는 눈빛으로 쳐다봐요. 아마 남한은 지옥과 같다고 이들에게 하도 허위선전해서 정말 그런줄 알고 있는 것 같았읍니다.
약림노파일가가 있던 곳은 흑룡강성 방정현의 보흥공사라는 30가구를 수용한 소규모의 집단농장, 수소폭탄을 실험하고 동방홍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등 군사면에서의 발전과는 멀리 전기도 경운기도 없는 반원시적 농업집단이라고 했다.
이곳 남녀농군들에게 있어 시간관념은 태양. 날이 새면 농장에 나가 일하다가 해가 져 곡물과 잡초의 분간을 할 수 없을만큼 캄캄해진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을 먹고 나면 고단한 몸을 쉬지도 못하고 야회에 나가 내일의 생산계획을 토의하고 모택동사상강좌를 받아야 한다.
일요일은 없고 휴일이라곤 1년에 3일뿐 정초와 단오절 추석에 하루씩 쉬는 것뿐인데 쉬는 날은 모택동사상 고취와 생산책임량 증대를 위한 행사 등으로 가만히 버려두지 않으므로 실제로 쉬는 날이란 하루도 없는 것이다.
벼농사도 지었으나 쌀밥은 한톨도 먹어보지 못했으며 주식은 옥수수, 수수, 좁쌀과 감자. 1년의 농사가 끝나면 각기의 생산량에서 공출책임량과 배급용식량을 빼고 남은 것을 현금으로 환산하여 받게 되는데 봄철과 가을철에 남루한 의류 한벌씩 사고 나면 빈털터리.
8통의 편지내용을 간추려 보면 산모가 쌀밥은 구경도 못해 젖이 안나온다. 본국서 보내준 조미료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43세에 이미 백발이 되어 버렸다. 두부 생선 등은 볼 수도 없으며 돈은 소용도 없으니 헌옷 가지를 보내 달라. 보내줬다는 사카란 5kg이 없으니 웬일이냐 . 4살짜리 꼬마는 아침부터 밤까지 책만 보는데 그것도 그림책 같은 것이 아니고 공산주의 서적들 뿐이다. 지금 청년돌격대에서 일하고 있다. 하루 빨리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빈다는 애절한 호소로 넘쳐 있다.
고국을 그린다 | 신문·방송통해 고국소식 알아 | 만난 사람마다 미국생활 질문 | 북괴와 서신왕래두절…대부분이 한국동경 | 북송교포 "연변에 도망치다 잡힌 사람 많아"
이 밖의 「뉴스」 매체로는 한글로 된 연변일보, 중국어판 길림일보 등 신문과 장춘에서 1주일에 2회, 약 2시간 정도 연변지역에 중계방영하는 흑백 TV, 연길의 한국어 방송, 길림의 중국어 방송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즐겨 듣는 방송은 KBS의 「자유의 메아리」 방송과 「미국의 소리」(VOA) 방송이다.
<한국발전상 잘 알아>
이들은 특히 한국의 발전상을 자세히 알고있는 듯 했고 미국과의 수교가 임박해서는 미국생활에 상당한 관심을 표시했다.
내가 집을 나와 산보라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쫓아다니며 질문공세를 폈다. 미국이 잘 살고, 과학이 발달했다는 것은 알고있으나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밥도 기계가 짓고 빨래도 기계가 한다는데 사실이냐』
다행히 내가 갖고 갔던 「폴러로이드」 사진기가 모든 대답을 해줬다. 이때까지 「컬러」 사진을 구경 못한 이들에게 천연색사진이 촬영하자마자 만들어져 나오는 광경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곳 동포들은 또 북한의 실정을 잘 아는지라 일부 거류민단간부를 제외한 대부분 사람들이 한국을 동경하고 있었고 남북한 국민전체의 자유선거를 통한 남북통일을 원하고 있는 듯 했다.
한때 이른바 김일성 혁명사상을 「테스트」 한다는 「고험」(시험)을 거쳐 북한으로 이왕한 동포들도 있었으나 요즘은 북한과의 서신왕래조차 끊긴 상태라고 했다.
오히려 일본에서 북송된 많은 북송교포들이 「연변자치주」로 탈출해 나오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일본에서 갖고 온 자동차·TV 등을 모두 북한당국에 뺏기고 빈털터리가 돼 다시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항의 「데모」를 하기도 했으나 모두 집단농장으로 보내졌고 연변으로 도망쳐 나오다 붙잡힌 사람만도 상당수에 이른다고 이곳 동포들이 알려줬다.
미·중공수교를 전후해서는 영어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져 국민학교에서조차 지금까지의 소련어 대신 영어를 외국어 교육과목으로 채택,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이른바 중점학교(일류학교)에서는 영어교육에 중점을 두고있다.
"만원버스를 탔다. 앉아 있던 중국인이 벌떡 일어나 앉으라고 권했다. 버스를 타려고 줄지어 있는 뒷줄에 서 있었다.. 누군가가 와서 팔을 잡아끌기에 어리둥절해 있으려니까 앞줄로 가라는 것이었다. 식당에 들어가봤다. 내국인식당인데도 외국인을 위한 전용특실이 마련돼 있어 그곳으로 안내 받았다. 공항대합실에도 기차역에도 외국인만이 들어갈 수 있는 전용특실이 있다."
중공은 외국관광객들도 자기 나라를 찾아준 외국손님이라며 대접을 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 서기 2천년에 중공1인당 국민소득의 목표를 ... 8백달러선으로 수정 ......... ]
중공의 새물결(중)
등소평 체제의 새과제들
[중앙일보] 1981.07.03
호요방이 중공당주석에 취임하고 첫 공개연설에서 하필이면 공산주의자로서는 이례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만고불변의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고 선언한 배경은 무엇보다 심각한 경제난국에 있다.
현재의 중공사회 경제체제는 정통적인 공산주의의 경제정책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치유할 수 없다는 중공지도부의 현실인식이 언뜻 보면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는 듯한 발언이 나오게 한 직접적이고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75년에 시작한 「현대화계획」, 화가 목표 늘려잡아 물가 치솟고 재정파탄 위기직면
불만 쌓이자 어쩔수 없이 자본주의식 치유책 도입
70년대 중반 주은내(전수상)로부터 현재의 등소평(당부주석)에 이르기까지 중공은 국민들에게 서기 2천년의 화려한 중공미래상을 청사진으로 제시했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그날의 과실을 위해 좀더 허리띠를 졸라매고 당지도부의 노선에 충실하고 헌신하라고 호소해왔다.
주은내는 75년 『중공이 서기 2천년에 공업수준이나 개인소득 등의 모든 면에서 구미선진국과 어깨를 겨루는 초현대적 사회주의 대국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는 야심적인 계획을 내놓았다. 4개현대화(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계획이 그것이다.
76년 주와 모택동이 사망한 후 대권을 장악한 화국봉은 지지기반이 엷고 권위가 허약한 것을 확대하고 벌충하기 위한 조급한 생각에서 4개현대화 계획을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늘려 잡았다. 중공의 연간석유 생산량의 반을 생산하는 대경유전과 같은 규모의 유전을 10개씩이나 건설한다는등 1백20개의 대형건설사업을 추진했다. 그것도 10년 동안 해내겠다는 것이었다. 투자소요 추정액만도 당시 6천3백억달러규모(부주석 이선념)였다.
서방세계가 맹목적으로 중공특수의 환상에 들뜬 것도 그래서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여건을 도외시한 이 계획은 2년도 못가 부작용을 낳았고 마침내는 이선념의 고백처럼 중공재정의 파탄일보 직전까지 몰아갔다. 화의 실세에 일조만 한 것이었다.
뒤이어 등소평과 진운(당부주식)은 그 계획을 백지화하는 3년간의 경제 조정기를 갖고 보다 현실에 근거한 새로운 8개년 계획을 제시했다. 등은 또 서기 2천년에 중공1인당 국민소득의 목표를 1천달러선으로 대폭 하향 조정했다. 등은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아 그 목표를 8백달러선으로 수정해야 할만큼 중공경제실정은 엉망이었다.
[ ...... 「그다니스크」 항도의 노동파업은 ..... ⓛ언론출판의 자유 ②자유노조 결성권 보장 ③정치범석방 ④국제노동 협정 준수 등 16개항의 새로운 요구조건을 제시 ......... ]
「폴란드」노동자 파업 | 반체제 운동으로 확대
[중앙일보] 입력 1980.08.18
【바르샤바17일 로이터·AP합동】 「폴란드」 최대 「레닌」조선소를 중심으로 4일째 계속되고 있는 「그다니스크」항도의 노동파업은 17일「그다니스크」시 주변 21개 기업체 노동자들이 공장파업위원회(MKS)를 조직, ⓛ언론출판의 자유 ②자유노조 결성권 보장 ③정치범석방 ④국제노동 협정 준수 등 16개항의 새로운 요구조건을 제시, 유례 없는 힘의 과시로 공산정권에 정면도전하는 정치사태로 악화됨으로써 공산 「폴란드」는 2O년 노동폭동이래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다.
7주째 계속되는「폴란드」전국의 노동파업에 호응, 지난14일 「레닌」조선소를 점령함으로써 발단된 「폴란드」북단「그다니스크」시의 노동파업은 「기에레크」 공산당정부의 유화책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악화되어 이 날 MKS가 21개 공장지도자의 이름으로 된 성명을 반체제자위안(KOR)을 통해 발표함으로써 정치대결로 변모된 가운데 공산정면에 대한 도전으로 확대되었다.
이번 「폴란드」 파업 소요는 지난 7월초 정부가 지난 수년간 공급부족 상태였던 고기값의 대폭 인상을 발표하자 「우르수스」「트럭」공장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면서 시작, 대규모 파업이 「루블린」·「브로츨라프」·「루기」·「바르샤바」및 그 밖의 도시로 계속 번져나갔으며 당국은 대부분의 경우 파업소요의 확산을 막기 위해 임금인상 및 그 밖의 요구들을 들어주었으나 지난14일「그다니스크」·「레닌」 조선소와 수많은 공장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고 더욱이 파업노동자들이 반체제 운동단체들과 손잡음으로써 반정부적 색채를 띰으로써「기에레크」당 제1서기가 이끄는 현정권은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
그에 따르면 북한주민들은 식구가 많든 적든 간에 가구당 방한칸을 쓰기 때문에 식구가 많은 가정은 큰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의복도 연간 한벌 정도밖에 배급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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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부림사건
[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는
부림 사건 피고인들이 판사 앞에서 당당하게 사회주의 이념을 주장했다는 ....... ]
[사설]‘부림’ ‘유서 대필’ 무죄, 진영논리로 재단할 일 아니다
기사입력 2014-02-14
영화 ‘변호인’의 모티브가 된 부림 사건과 강기훈 씨의 유서 대필 사건에 대해 재심에서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부림 사건은 수사기관의 증거가 불법으로 수집됐고, 강 씨의 유서 대필 사건은 필적 감정의 결과가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합리적으로 수집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증거만이 유죄를 만든다는 형사소송의 원칙을 확인한 판결이다.
부림 사건은 1981년 공안 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등 19명을 적발해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한 사건이다. 부산지법 형사항소2부는 “피고인들이 수사기관에 자백을 했지만 진술서가 자백이 이뤄진 지 상당 시간 경과한 뒤에 작성된 데다 불법 구금 기간이 오래돼 진술서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무죄 이유를 밝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는 부림 사건 피고인들이 판사 앞에서 당당하게 사회주의 이념을 주장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번 무죄 선고는 부림 사건의 실체와는 상관없이 불법 수집한 증거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지닌다.
영화 ‘변호인’에서는 피고인들을 고문하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재판부는 고문의 존재 여부에 대해 판단하지 않았다.
3. 피고인 1, 6, 7, 11의 각 상고이유 제4점 피고인 4, 8, 10, 15의 각 상고이유 제3점, 피고인 3, 9의 각 상고이유 제2점 및 위 동 변호인의 상고 이유 제1점에 관하여,
이른바 집회라는 것은 특정 또는 불특정 다수인이 특정한 공동목적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일정한 장소에 모이는 것을 말하므로 특정한 공동목적없이 우연히 만나는 것등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모이는 사람의 다과에 아무소장이 있을 수 없고, 한편 계엄법은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적과 교전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되었을 때,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모든 실내의 집회에 허가를 받게 하거나 일체의 정치목적의 옥내 외 집회를 금지하고 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헌법위원회의 결정에 의하여 해산된 정당 또는 예속단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집회 재판에 영향을 미칠 염려가 있거나 미치게 하기 위한 집회 공공의 안녕질서 유지에 관한 단속법규에 위반하거나 위반할 우려가 있는 집회 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 등을 금지하고 있는 터이므로
원심판결이 이와 같은 취지에서 그 거시증거를 종합하여 피고인등이 우리나라의 현실을 반민족, 반민주적 팟쇼체제로서 노동자. 농민 등 노동대중을 수탈 착취하여 부익부 빈익빈의 모순사회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등 모든 분야에서 제국주의, 식민주의 사회로 전락되었다고 분석 평가하고 이러한 모순과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하여는 사회주의, 공산국가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서로의 의견일치를 보아
부마사태, 광주사태의 실패에 비추어 대중봉기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면 의식화된 대중조직을 강화하여 결정적 시기인 대중의 경제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현실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졌을때, 현체제의 모순이 첨예화하여 합법적 수단으로는 통치가 불가능해졌을때 대중이 의식화되고 그 조직이 강화되었을 때 등의 시기를 포착하여 대중봉기로서 자유민주주의 현체제를 뒤엎어 사회주의, 공산국가를 건설하여야 하고
이러한 사회주의 혁명에 필요한 여건조성방안으로 대중조직을 강화하기 위하여 의식화 과정 즉 현실분석, 비판 반정부 비판의식 강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의식고양 등을 거쳐 단계적으로 대중을 의식화시키고 이를 조직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학생, 고등학교학생, 노조원, 여공, 사북탄광 광부, 양서조합등 협동조합운동원 등을 상대로 소그룹활동 프로그램 또는 후라이데이. 세터데이 등에 따라 정기적 또는 비정기적으로 소위 의식화교육을 위한 모임을 되풀이하여
혹은 노동경제학, 사회계급론, 금일의 철학, 현대철학의 설계, 소외론 등 주로 맑스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많은 서적과 중국 공산당중앙위원회가 당간부 교육을 위하여 발간한 사상방법론, 조선노동당규약 등을 교재로 반국가단체나 국외 공산계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여 이를 이롭게 하는 의식화교육을 하고, 혹은 학원데모를 모의하거나 그 평가와 사후 수습책을 토의하고 혹은 위와 같은 내용의 유인물을 작성 살포하는 등 원심판시 피고인등의 범죄사실을 확정하고
이를 계엄법상의 계엄당국이 금지하는 집회 및 정치목적의 집회 또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3조 제1항 제4호 소정의 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라고 판시하였음은 정당하고 이에 이르는 과정에 채증법칙위반이나 법리오해 또는 심리미진의 위법을 가려낼 수 없고
소위 정치목적의 집회는 계엄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예를 들어 정당의 창당 등 정치적 결사를 위한 집회라던가 또는 대통령을 추대하기 위한 집회등 구체적이고 뚜렷한 정치목적을 위한 집회에 한한다고 해석할 근거도 없으므로 소론 논지는 독자적 견해에 불과하여 채용할 것이 되지 못한다.
우리시대 ‘사상의 은사’였던 리영희 선생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회에 눈을 뜨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7일 오후 리영희 선생 빈소가 차려진 서울 신촌 연세 세브란스 병원을 찾아 조문하고, 부인 윤영자(78)씨를 만나 “선생은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정신적인 스승이었다”고 말했다.
문 전 비서실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평범한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부일 사건’을 통해 사회의식을 가지게 되었는데, 피고인을 변호하면서 선생님의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다 읽었다고 하더라. 그것 보고 (노 대통령이) 의식화 되신 것”이라며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정신적인 스승”이라고 말했다.
문 전 실장은 “리영희 선생이 참여정부 기간에 진실과화해위원회 자문위원을 맡아 과거사 정리 작업에 격려를 많이 해주셨고, 최근에는 노무현재단의 고문을 맡아 몸이 불편한 가운데서도 도움을 주셨다”며 “참여정부를 많이 응원해 주셨다”고 소개했다.
문 전 실장은 “우리 세대들에게나 학생운동, 민족운동 한 사람들은 선생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며 “개인적으로도 선생님을 통해 이 세상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지식인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런 것을 배우고 큰 사표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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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는 지난 3월에 발간된 「대화」라는 책에서 소년 시절 社會主義 사상에 경도되어 있던 외삼촌 최모린을 존경했다고 밝혔다. 그 다음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은 巨富였던 외조부 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 사라진 뒤 독립군의 일원이 되어 세 번에 걸쳐 외조부의 재산을 털고 끝내 외조부를 총으로 죽인 머슴 문학빈(그후 일본군에 협조한 것으로 밝혀짐)을 憧憬(동경)하며 성장했다고 말했다.
리영희는 미군 통역관으로서의 軍생활과 외신부 기자 생활을 하면서 軍의 불합리와 부패, 그리고 당시 기자 사회에서 나타난 부조리와 연줄관계에 비판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었다. 리영희는 「그 代案으로서 중국혁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는 중국 毛澤東(모택동)의 중국 사회주의 혁명과 1965년에 일어났던 文化革命(문화혁명)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의 사상적 기조를 형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그후 일관되게 親北 논조를 유지하면서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사회주의국가에 대해서는 동경하는 태도를 견지해 오고 있다.
리영희는 『문화대혁명은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만들어진 인간을 개조하여 사회주의적 인간을 만드는 것과, 계급분화의 제 조건을 근본적으로 제거함으로써 평등한 인간사회를 보장·발전시키는 사회구조를 창조하자는 두 가지의 목적을 지닌 운동』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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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리영희는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毛澤東을 극찬하고 있다. 그는 한 서방의 평자의 말이라고 하면서 『레닌은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은 하였으나 공업화는 못 했다. 스탈린은 공업화는 했으나 인간혁명은 못 했다. 毛澤東은 공업화와 인간혁명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최대의 극찬을 늘어 놓았다.
리영희는 한마디 더 덧붙인다. 『문화혁명이라는 급격하고 웅장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미국 기자들만 모를 뿐 全세계에 널리 알려진 지 오래다』 리영희는 『毛澤東은 레닌과 스탈린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회주의 사상가로서 인간의 평등사회에 대한 꿈을 실현하는 올바른 노선에 있다』고 했다. 그 노선의 실현이 문화대혁명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리영희는 1977년 발간된 「우상과 이성」에서 문화혁명 당시의 「下放(하방: 지식인을 지방으로 내려보내 노동을 시키는 운동)」을 「인간우선주의」의 실천으로 부르고 있다. 그는 『이러한 문화혁명의 과정이 (스탈린의 경우처럼) 무시무시한 내부 숙청이 아니라 이론정립과 토론, 자기비판, 설득 등 매우 인간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고 찬양했다.
그 예로 『가장 극심한 비판을 받았던 劉少奇도 北京 교외에서 현재 再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리영희의 毛澤東 숭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毛澤東은 인간적으로 그릇이 매우 큰 영웅의 풍모를 지녔고 동시에 사상가·교육가·정치가·전략가·詩人 등 다양한 자질을 한몸에 지닌 인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리영희는 더 나아가 『毛澤東이 사회주의 혁명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마르크스·레닌·스탈린 세 사람을 합친 것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했다.
남북한은 치열한 경제적경쟁을 벌였으나 70년대 중반기부터 남북한간에는 경제적격차가 현저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국민총생산 규모(81년말 현재)는 한국이 gnp 6백22억달러 ,1인당 gnp 1천6백 7달러 수준인데 비해 북한은 gnp 1백36억달러, 1인당 gnp 7백50달러로 추계됨으로써 북한은 한국에 비해 gnp규모면에서 22%, 1인당gnp면에서 4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같은 경제총량규모의 현저한 격차는 한국경제가 60년대 이후 고속성장을 지속했고 특히 73-74년, 78-79년의 세계적불황에도 불구하고 이에 적절히 대처해온 반면 북한은 최근 투자율이 30% 이상의 고율인데도 불구하고 자본의 낭비와 비효율적인 투자계획으로 인해 경제가 침체의 국면에 빠져 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북한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gnp에 대한 군사비부담률은 81년에 한국이 6.3% 수준인데 비해 북한은 23.8%로 군사력증강에 혈안이 되고 있음을 엿볼수 있다.
수출면에서는 81년 한해 동안 한국은 2백13억달러로 북한의 13억달러보다 16배나 되고 있다. 수출주종품목도 한국이 수출품목의 93%가 공산품인데 반해 북한은 59%가 석탄 철광석 연 아연 등 1차산품이다.
..... 중공의 1인당 GDP는 3백10달러 .... 중공의 엥겔계수 ... 60% 정도 ......
..... 82년 대만의 GDP가 2천3백42달러 ....... ]
1984.12.7. 매일경제
"서구를 따라잡자" 열기충만
대변신 ... 중공경제 <상>
미나미 료오신
중공이 개방정책으로 선회한 이후 서방국들은 대중공잔출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은 컴퓨터부문에서 미국과 선두다툼을 벌이면서까지 대중공 시장확대에 급피치를 올리고 있다. 이같은 추세속에 최근 중공의 대변화현장을 둘러 보고 온 일본의 미나미 료오신 일교대교수는 본사의 독자들을 위해 직접 쓴 견문록을 본사 이정근 동경특파원을 통해 보내왔다. 생동감이 넘치는 르포 형식의 이글을 3회에 걸쳐 소개하기로 한다.
주요물자는 대부분 배급제로 국가에서 할당되는 쿠폰으로 물건을 배급받던 것은 이제 옛날 얘기라고 한다. 상품생산이 급증하면서 배급품목은 대폭 줄고 있으며 현재는 쌀등 주식과 식용유 정도가 남아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생활용품 자유매매
자전차 시계 TV 등도 자유스럽게 살 수 있다. 문혁이 끝난 직후인 78년부터 82년 사이의 변화상을 보면 1백명당 자전차 보유대수는 7.7대에서 13.1대로 늘어났고 시계는 8,5개에서 18.8개 TV는 0.3대에서 2.7대로 늘어났다.또한 과거 인민복일색이던 복장도 변해 신사복을 입은 남자도 가끔 볼 수 있다.
이대위는 자기가 북한에서 조종사로 근무하면서 81년 리비아 수단 이집트등 중동지역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동료들로부터 외국비행사들은 승용차 TV 냉장고 등을 소유하고 잘사는데 북한비행사들은 난로용 화목을 직접 채취하고 78년부터는 간식 기호품공급이 점점 적어 지더니 나중에는 담배 술까지 제한받는 등 먹는 것까지 걱정해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이같은 북한실정에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MBC TV 기자와 함께 서울 밤거리를 돌아 보고 대포집에서 시민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일과가 끝난 후 휴식을 취하는 서울사람들의 생활을 보니까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북한서는 3간짜리 집에도 전기를 다 켜지 못하게 하는 판인데 이곳에 와 보니 낭비가 너무 많다"고 말하고 되도록 절약해서 국력을 기르는 데 이용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18세나 됐을까 싶은 전사가 찬바람이 쌩쌩 부는 활주로 끝 내 비행기 밑에서 일하다가 나에게 기체를 인도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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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는 동장갑 한개 없나"
나는 겨우 이말 밖에는 못했다.그는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 보더니 힘없이 대꾸했다.
"줄게 뭐야요. 목테(머플러)조차 없고 솜신이 헤어져도 그것조차 갈아주지 않는 걸요 -- "
그러고 보니 그는 목에 때가 더럽게 낀 수건을 두르고 있었고 신발은 앞이 터져 발싸개가 삐주룩이 나와 있었다. 발은 동상에 걸린게 틀림 없을 것이다.
1984년 9월 남한에서 수재로 인해 1백90명이 사망하고 20만 명의 수재민이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 9월 8일 쌀 5만섬을 비롯한 구호물품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해 왔다. 당시 <노동신문>은 구호활동을 ‘분단 40년 역사 이래 최고의 위업’이라며 대서특필하며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남한에 도착한 쌀은 쌀이라고 하기엔 질(質)이 상당히 떨어지는 것이었다. 언제 수확한 것인지 색은 변색된 데다가 묵은 냄새까지 풍겨 밥을 지어 먹는다는게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북한에서 보내온 쌀을 비롯한 구호물품은 북한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남한 사회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증거로 활용됐다.
[ ..... 가격구조 및 임금체계를 자유시장기능에 맡기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혁명적인 경제개혁조치를 ....... ]
1984.10.22. 경향신문
북경의 자본주의 혁명
등체재의 확률 높은 도박
자유시장원리확대
좌파반발무마등 숙제로
중공당전체회의의 '경제개혁' 선언의 의미
중공당 제12기 중앙위 3차 전체회의 (12전3중전회)는 20일 건국 이래 추구해온 소련식 중앙통제경제 정책을 철회하고 가격구조 및 임금체계를 자유시장기능에 맡기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혁명적인 경제개혁조치를 내년 1월 1일부터 실시키로 결정함으로써 과감한 자본주의식 경제제도의 도입을 공식화 했다.
'경제혁명'이라고 불리는 이번 개혁조치는 전경제의 약75%를 자유화시키는 것으로서 그동안 중공이 추구해온 4개현대화계획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다는데 큰 뜻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사회주의에 자본주의 방식을 가미한 이번 개혁의 주요골자는 첫째 일부 전략품목을 제외한 공산품과 농산물의 국가쿼터제를 폐지, 중앙통제경제구조를 지방분권화하며, 둘째 모택동 시대의 가격 및 임금 구조가 수요공급의 원리와 생산성에 따른 적절한 보수를 받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 시장경제의 원리를 도입 적용한다는 두가지로 요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