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천 서울포스트 자유기고가

1,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

   
▲ 그림과 제발(題跋)
   
▲ 그림 부분
추사(1786-1856)의 고조부(金興慶)께서는 영의정을 지냈으며, 그의 부친 김노경(金魯敬;1766-1840)은 순조때 이조판서를 지냈고,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효명세자의 최 측근이었다. 당시 순조께서는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막기 위해 대리청정을 시켰던 것이며, 경주 김씨인 김노경으로 하여금 세자를 보필케 하였다.

추사가 24살 되던 해에 부친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청나라를 순행할 때, 추사도 군관 자격으로 동행하여 꿈에 그리던 청나라 대 학자들과 문인들을 만났다. 당시 청나라 정치가이며 대 학자인 운대 완원(阮元;1764-1849)과 경학의 대가인 옹방강(翁方鋼;1733-1818), 그리고 그 외 청나라의 유명한 문인들도 이때 만났다. 추사는 추사대로, 청나라 문인들과 완원은 물론이요, 당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표방하며 실학(實學) 추구에 전념하던 옹방강을 한 없이 존경하게 되었고, 청나라 문인들은 또 추사의 깊은 학문에 감복하여, 당태종이 세운 법원사에서 전별연을 배풀고 전별도를 그려 주었다. 추사를 만난 적도 없으면서 추사의 소식을 들은 청나라 문인 정조경은 추사보다 한 살 위인데도 불구하고 근엄하게 서 있는 추사 앞에 엎드려 절하는 자신을 그림으로 그려 추사에게 보내 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추사는 젊은 나이에 이미 청나라에 까지 그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던 것이다.

서얼 출신이면서 실학의 대가이던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시던 추사는 옹방강의 실학사상에 깊이 심취하여 그가 죽기 전에 그의 학문을 모조리 습득하고 저 과거시험도 미룬 체, 한 때 금석학에 몰두하여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비문을 처음으로 해석해 내기도 했다. 그가 이 비문을 해석할 때까지 당시 아무도 그 내용을 몰랐었다고 한다. 그가 38세 되던 순조 19년에 뒤 늦게 과거시험을 보고 급제하여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갑자기 급서하고 8세의 현종이 즉위하면서(1834),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부활하게 되었다. 이 때 안동 김씨들이 조작한 윤상도의 상소 사건에 연류되어 추사는 제주도에 유배되어 서귀포 대정읍 한 민가에 위례안치 되었다. 문밖 출입도 금지되고 먹는 것 입는 것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다행이랄까? 이 무렵 그는 그 유명한 추사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추사는 명문가 출신이면서도 서얼 출신인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셨고, 중인 출신인 이상적, 오한석, 이한철을 제자로 두었다. 옹방강의 실사구시 정신을 따른 것이다. 이들 제자 중 특히 온양 군수로 있던 역관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1804-1865)은 청나라에 12번을 왕래하면서 교우한 청나라 문인들이 12권의 이상적 문집을 발간해 주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중인 신분이라 문집 발간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스승 추사를 존경하는 마음이 각별하여 청나라 역대 유학경전을 엮은 한 수레 분량의 황청경해(皇靑經解)를 구해다 주는가 하면, 특히 제주도 유배 시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청나라 각종 신간 서적들을 구해다 주기도 하고 지성으로 섬겼다. 이에 대한 고마움이 뼈에 사무친 추사가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이 바로 세한도(歲寒圖)다. 1844년이다. 이 무렵 그는 절친한 친구인 안동 김씨 김유근의 도움을 내심 기대 했겠지만 그도 갑자기 타계하여 낙심천만이었다. 또한 그의 사랑하는 아내 이씨도 타계했다. 유배 생활 9년, 황량하고 고독한 가운데 제자 이상적의 충심이 너무도 고마웠던 것이다.

추사가 그의 절친한 친구 초의선사(草依禪師)에게 밝힌 바에 의하면, 세한도는 소위 초묵법(焦墨法)으로 그렸다. 먹물의 짙고 묽음으로 농담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짙은 먹물 만으로 속도와 강약을 조절하여 농담을 표현하는 수법이다. 세한도에는 오른 쪽 상단에 세로로 歲寒圖라 쓰고 그 왼쪽에 가로로 藕船是嘗 이라 써서 우선(이상적)은 감상해 보라고 했고 그 왼쪽에 완당(阮堂)이라고 자신의 호를 쓰고 그 밑에 낙관을 찍었다. 이 낙관과 藕船是嘗이라는 글을 우측으로 뻗은 가지의 솔잎이 바치고 있는 형국이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황량하고 쓸쓸하기 이를 데 없고, 윤곽(허울) 뿐인 집 한 채와 잣나무 세 그루 그리고 노송 한 그루가 전부다. 얼핏 보기에는 “뭐! 이런 그림이?” 싶을 정도로 단순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지나치리 만큼 황량한 주변은 당시 그의 처지를 잘 표현하고 있고, 노송의 고고한 자태는 고매한 선비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세한’이라는 말은, 논어에 ‘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추위가 지난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았음을 안다)’에서 발재한 것으로 극한 상황에 처해서도 굽히지 않는 선비의 지조를 잘 말 해 주고 있다. 하여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최고 경지의 문인화로 추대되고 있다. 이 상적은 이 그림을 받아 들고 다음해 청나라로 가져 가서 문인들에게 보여 주었다. 아마도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스승 구명운동이었는지 모른다. 하여 16인 청나라 문인들의 감상 평문을 붙여 표구하여 스승에게 보여 주었고 추사는 이에 대 만족하였다 한다. 세한도 덕분일까? 추사는 다음해 귀양에서 풀려났지만 얼마 안 가서 다시 함경도로 유배 당했다.

세한도는 이상적의 제자 손을 거쳐, 왜정 때는 평생을 추사연구에 헌신한 경성제대 일본인 교수 후지스카에게 넘어가 일본으로 가져 간 것을 해방 직전 손재형이 되찾아 와서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으나 손창근 개인소유로 되어있다. 전 이시영 부통령, 독립운동가며 서예가인 오세창, 국문학자 정인보 선생의 감상 평까지 더한 총 길이 14m. 국보 제 180호.

2, 이순신의 자살

해양 대국 영국의 해군사관학교 교과서에도 올라 있는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 특히 일본의 학자들과 중국의 이순신 연구가들까지도 왜 이순신 장군이 자살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일까? 자살의 직접적인 물증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로 보는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순신 장군이 수적으로 우세한 왜적을 맞이하여 왜 연전연승(23전 23승) 할 수 있었는가?부터 살펴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첫 번 째는 화력의 엄청난 차이와 유효사거리에 있었다. 당시 왜국의 주 무기는 개별 병사들 소유의 조총이었고 이를 간파한 이순신 장군은 조총 유효사거리의 배가 넘는 승자총통 등 화포를 주 무기로 삼았다. 두 번 째는 적을 격파할 수 있는 진법에 능수능란 했고 세 번 째는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 즉 적을 격파하기 유리한 곳으로 적을 유인하여 깨트렸던 것이다. 네 번 째는 거북선이다. 거북선은 근 접전에서도 적군의 조총 화력을 능히 막아낼 수 있는 철갑으로 덥혀 있었다. 왜선은 판옥선이며 여기에는 대포를 장착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이 왜적의 조총 유탄에 맞고 전사하기 위해서는 갑옷을 벗고 거북선의 전면 좁은 창문에 일부러 장시간 노출되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고도 배가 조총 사거리 안으로 근접해야 한다. 그러나 당시 전투상황을 보면 왜선에 근접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자살을 작정하지 않고는 어느 누가 감히 이런 행위를 하겠는가?

그러면 이순신 장군은 왜 자살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첫째 왜군이 국토를 유린하긴 했지만 이순신 때문에 서해로의 보급로가 확보되지 못해 육군이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또 왜국의 해군은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다. 그래서 풍신수길은 이미 왜군의 철군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며 이순신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더 이상의 침략이 없도록, 퇴군하는 왜적을 불러들여 최후의 일격을 가했던 것이다. 이로써 이순신은 임무를 끝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둘째, 이제 전쟁이 끝나면 이순신 앞에 기다리는 것은 귀양 아니면 죽음 밖에 없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불세출의 영웅 앞에 왜 이 같은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이순신을 수군절도사에서 졸병으로 끌어내린 자들이 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전쟁이 끝나면 이순신 장군을 데려다 크게 쓰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남의 나라에 모진 목숨을 의탁하느니 차라리 장렬한 전사를 택했던 것이다.

3, 오늘의 교훈

미국이 오늘날 어찌하여 정치, 군사, 문화, 경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세계 제일의 국가가 되었는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그것은,

첫째 전세계의 인재들이 구름처럼 미국으로 몰려 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자국에서는 열악한 환경과 처우 때문에 뜻을 펴지 못하다가 미국에 오면, 흑인이던 아시아인이던 아랍인이던 인종과 관계없이 능력껏 뜻을 펼 수 있다. 그래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이 세계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둘째 자본주의 최대의 적은 부정부패다. 미국이라고 자본주의를 견지하고 있는 한 부정부패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은 사전이던 사후던 부정부패에는 철저히 철퇴를 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얼마 전 ‘앤론’이라는 기업이 분식회계를 했다 발각되어 회사가 파산됨은 물론 사주는 자살하고 최고 경영자는 현재 20년 형을 살고 있다. 이에 비하여 우리는 어떤가? 앤론의 몇 십 배 부정을 저지르고 500억불이 넘는 외화를 불법 해외 도피 시키고도 불과 몇 개월 갇혀 있다 나와서 활개치고 돌아다니며 추징금은 형식일 뿐 안 내도 그만 아닌가? 과연 한국은 부정부패의 온상인가?

시대적으로 약 200 여 년이 넘게 앞선 이순신 장군을 뒤에 기술한 이유가 있다. 뛰어난 인재를 사장시키는 풍토를 부각시키고 저 함이다. 약관 20세 전후에 학문이라는 학문은 모조리 섭렵하여, 당시 청나라의 내노라는 학자들을 놀라게 한 천재중의 천재인 추사 김정희. 우리에게는 단지 ‘명필’ 정도로만 알려진 전대미문의 대 석학. 시대를 앞서 간 실학(實學)의 대가. 그가 만약 귀양살이로 장년 이후의 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승승장구하여 영의정에 올라 서양 문물을 받아 들였다면, 이는 일본의 명치유신보다 약 50년이 앞선 것이며, 그 결과 우리는 오늘날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대 선진국이 되어 있을지 누가 아는가? 이와 같이 유능한 인제가 사라질 수 밖에 없는 풍토에서 이순신이 살아남아 뜻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자살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만약 개선하여 뜻을 펼칠 수 있었다면, 모르긴 하지만, 옛 발해 땅을 되찾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런 연후 김정희가 개방정책을 폈다면? 최소한 한일 합방이나 분단 같은 것은 없었을 지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인재들이 능히 그 뜻을 펼칠 수 있는 나라는 흥하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망한다는 것이다. 조선은 결국 망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작금의 우리나라는 어떤가? 대학은 그렇고 그런 인물들이 거의 모두 뒷문으로 들어와서 학문은 뒷전이요 대학교직이 무슨 정상배들의 발판으로 변질 되어 가고 있으며, 또 이들 정상배들은 잿밥에만 눈을 부릅뜨고 온갖 비리와 불법을 자행하고 있어, 나라 꼴이 마치 과거 아르헨티나나 오늘날 그리스처럼 몰락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계 10위 이내의 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는 이미 국가 부도를 겪었고, 한 때 일인당 국민소득이 4만 불에 가까웠던 그리스는 이제 거의 파산지경이 되었다. 두 나라 모두 정상배와 고위층의 부정부패가 주된 원인이라 한다. 국내 산업에 투자되어 고용을 촉진시켜야 할 자금이 부정부패의 사 금고를 채우거나 해외로 유출된다면 그만큼 국내경제에 타격을 주게 된다. 하여 유능한 인재들이 사장(死藏)되는 나라는 종국적으로 패망의 길로 들게 마련이고 음성적 자본유출이 심한 나라의 경제는 파탄 나기 마련인 것이다. 한국이 세계 제 10위의 무역 대국이면서 청년실업이 OECD 국가의 상위를 점하고 있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서울포스트 ▣ 재미교포 자유기고가 (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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