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립 뉴시스 문화부장

   
 
언중은 ‘스님’보다 ‘중’을 더 좋아한다. 중은 그러나 낮춤말로 수용되고 있다. 스님이라고 해야 당사자가 만족한다. 어감 차는 엄연하되 이해관계자가 아니라면 스님이나 중이나다. 그렇다고 스님을 중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는 무망하다. 때가 너무 늦었다. 궁중의 높은 인물을 지시하는 데 쓰이던 ‘마노라’가 ‘마누라’라는 호칭으로 전용된 것이 보기다.

‘승+님’에서 ㅇ이 탈락해 스님, 또는 ‘스승+님’에서 스님이 왔단다. 승(僧)은 승가(僧伽), 즉 부처의 가르침을 믿고 불도를 실천하는 집단의 줄임말이다. 순우리말 같은 중(衆)은 뜻 그대로 무리를 가리킨다. 승려(僧侶)는 본디 복수명사이지만 단수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님’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의존명사 ‘님’은 ‘씨’보다 높다. 이 경우에는 띄어써야 한다. 그럼 ‘스 님’이 된다. ‘님’이 높임 접미사라면 ‘따님’처럼 붙여쓴다. 스님은 둘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 모르겠다. ‘님’자에 몹시 인색해 그냥 ‘스’라고 칭하는 이웃종교 신자도 봤는데, 그건 개그다.

영어로는 (부디스트) ‘몽크’다. ‘싱글’, ‘혼자서도 잘 지낸다’는 그리스어에서 왔다. 미국 TV드라마 ‘몽크’의 주인공도 불가의 몽크 같다.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둔다. 남의 영역으로 침입하는 법이 없다. 언제나 단정하다. 사소한 것에서 핵심으로 치닫는 연역법의 대가다. 불교 몽크가 화두를 붙들고 깨우치는 것과 일맥상통이다. 이 몽크가 그 몽크요, 저 몽크는 여기 있도다.

‘도박 & 주지육림’을 실천한 조계종 승려들에게 ‘햇병아리 중’이 확인한다. 경기 안성에서 자살방지 사찰 ‘묵언마을’을 운영하는 태고종 승려 지개야다. “곡차라는 이름으로 술을 마시는 스님들, 향 공양이라며 피우는 담배, 도박까지 타락할대로 타락한 스님들이 정의사회를 구현한다면서 광우병 촛불시위, 4대강 반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등에 앞장선 무차회 큰스님들이 아닌가?”

이어 “왜 도박을 했는지는 정확히 잘 모르지만”이라면서도 “승려라면 지켜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실천계율인 생명을 죽이지 마라(不殺生),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마라(不偸盜), 사음하지 마라(不邪婬), 거짓말을 하지 마라(不妄語), 술을 마시지 마라(不飮酒)는 오계 중 셋인 불음주, 불망어, 불투도를 어긴 것이 아닌가”라고 따진다.

지개야는 “출가 전 마음이 맞는 사람과 만나면 하룻밤에 소주 한 됫병을 대작하면서 담배 2갑을 피울 정도였으며 돈도 잘 벌었다. 출가로 옷 무늬만 바꾼 승려가 된 나는 중 노릇은 잘 못해도 술과 담배, 도박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복 지(祉), 빌 개(丐), 어조사 야(也)다. 얻어먹을 복도 없어 얻어먹을 복을 구걸하는 ‘복 구걸 거지’라는 법명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불교의 운영 책임자이신 큰스님들은 ‘닭벼슬보다 못한 중벼슬’ 싸움을 하루도 멈춘 날이 있습니까”라고 태연히 결례한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내가 먼저 깨우치고 난 후 중생을 구하라는 대승불교의 진리를 따라한다면 몇 명이나 깨닫고 나서 중생을 구제할까? 이보다는 하화중생 상구보리, 삶의 고통에서 신음하는 중생을 먼저 구제하면 깨달음은 그냥 올 것인데…”라며 나름대로 우선순위도 건의한다.

내친김에 영 블러드 수혈을 촉구한다. “큰스님들이시여! 그러기 위해서는 돈과 벼슬 맛을 모르는 출가한 지 5년 미만인 스님! 아상은 없고 오직 하심으로 부처님의 진리만 찾고자 하는 스님들을 모아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하는 의심 덩어리를 내려놓고 엎드려 삼배를 드립니다.” (※지개야는 젊지 않음.작년에 환갑을 맞았음)

마광수 교수도 지개야처럼 관용구의 앞뒤 바꾸기를 즐긴다.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가 대표적이다. 불가 밖 인사인 데다 리버럴 인문학자이므로 마 교수는 불교를 객관할 수 있다. 그의 불교론 중 일부가 뭉툭한 듯 급소를 찌른다. “색(色)을 가장 경계하는 것이 불교라고 돼 있으면서도, 원효같은 이의 경우는 오히려 색을 몸소 실습했기 때문에 얼렁뚱땅 더 존경받는 것이 불교다. 경허 선사의 예도 마찬가지인데, 이처럼 불교는 원래 융통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 종교인 것이다.”

따라서 “불교이론에 너무 겁먹지 말아야 한다. 흔히들 ‘불교는 너무 어렵다’고 하는데, 어려운 것일수록 사변적 관념의 유희이게 마련이므로, 어렵다는 것 자체만으로 외경심을 갖고 숭배하는 실수를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귀띔한다.【신동립 뉴시스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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