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그나로크 성전’ 등 게임용어의 원천은 북구신화다. ‘반지의 전쟁’에 나오는 반지 모티브 역시 그곳에서 비롯됐다. ‘해리 포터’는 영국 전통문화의 결정체다. 신화와 민담, 인간의 삶을 촘촘히 엮어 세계인을 사로잡는 소설과 영화로 재탄생시켰다.

이런 이야기를 지어내자는 움직임이 우리나라에서도 구체화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서원, 유산, 전쟁, 생활, 사행, 분쟁 따위를 담은 조선시대 일기자료를 가공해 창작소재로 건네는 ‘스토리 테마파크’를 차렸다. ‘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 공식기록과 달리 서사구조가 다양할뿐더러 일상이 반영된 흥미진진한 일기장들이다. 이 일기류에서 추출한 창작 모티프만 627건이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 부랴부랴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이 1592년 5월12일 큰비 내리던 밤 첫 아기를 얻었다. 광해군의 첫 왕자 출생기록에 4년 앞선다. 하지만 얘가 왕자인지, 공주인지조차 모른다. 모든 기록에서 깨끗이 실종됐다.

1616년 7월11일 경북 예안의 김택룡이 말을 도둑맞았다. 종들이 쫓아갔고, 말도둑은 활에 맞아 죽고 말었다. 절도가 살인으로 커졌다. 사건 처리과정을 살피면 조선의 법집행 실례가 드러난다.

1599년 10월25일 사행단 서장관으로 북경에 간 조익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신들을 대접하는 음식을 종업원들이 훔쳐가다니…. 황제에게 표문을 올리는 예식을 거행하고 난 뒤 예부가 관장한 만찬에서 벌어진 일이다. 명나라 말 조정의 무너진 기강이 간파된다.

이들 일기에는 도망가는 노비 탓에 힘들어 하는 양반, 보릿고개에 환곡이라도 받아야 연명되는 일상, 자식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억지로 한 줄씩 쓰는 일기의 슬픔, 언제 어디서 횡사할는지 불안하기 짝이 없는 피란길의 공포가 들어 있다.

실마리에 상상의 날개를 달면 신윤복(1758~?)은 여자였다는 영화 ‘미인도’가 나온다. 세종대왕(1397~1450) 때 혜성같이 등장했다 사라진 생몰년도 불상의 장영실도 되살릴 수 있다. 세종이 탄 가마가 부서지면서 자취를 감춘 위대한 과학자다. ‘동국여지승람’은 아산에 명신이 살았다는 정도로 장영실의 후일 행적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장영실의 아버지는 중국인이다. 장영실이 중국으로 갔다면? 블록버스터, 대하사극이 움트는 순간이다.

철종(1831~1863)의 초상화는 가짜인지도 모르겠다. 소수가 알고 옹립한 왕의 얼굴그림 모델이 제3의 인물이 아니라는 보장은 없다. 알렉산더 뒤마의 ‘철가면’을 능가하는 스토리 발굴이 가능한 강화도령 캐릭터다.

안중근(1879∼1910)과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심령물의 주인공감이다. 안중근이 잠들어 있는 곳을 찾으면, 즉 ‘봉인’이 열리면서 시작되는 극이다. 박정희(1917∼1979)와 김재규(1926∼1980)가 특별출연한다. 이토의 환생이 박정희, 안중근의 환생이 김재규라는 요설이 전제다. 이토와 박정희는 10월26일에 숨졌다. 일본은 박정희처럼 이토를 근대화에 기여한 중요인물로 받든다. 더욱이 안중근은 탄생부터 판타지다. 가슴과 배에 점 7개를 찍고 나왔다.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했다고 응칠(應七)이라 불렸다.

1651년에 선종한 오타 줄리아를 조명하면 곧 가톨릭 단체관람이 기대되는 흥행성공작이다. 임진왜란 때 부모를 잃은 줄리아는 왜군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양녀가 돼 일본으로 끌려가 순교한 천주교 동정녀다. 고니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됐다. 도쿠가와가 천주교를 금하면서 오시마, 니지마를 거쳐 고즈시마에 유배됐다. 이들 섬에서 성녀로 살았고, 요즘은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역사 왜곡이라고 흥분할 사안은 아니다. 역사를 배우고, 역사 자격시험까지 치르는 역사를 좋아하는 이들의 지향점이어야 한다. 팩트에 픽션을 보탠 팩션은 국제적 추세다. 역사 전공을 폐지하고 역사 콘텐츠학과로 탈바꿈을 꾀하는 대학이 낯설지 않다. 팩션의 바탕인 역사연구 조류는 미시로 흐르고 있다. 이것들로 쓴 책, 즉 눈에 확 들어오는 콘텐츠는 발표 즉시 영상물로 둔갑하는 오늘이다.

한국에도 역사 변이 자원은 풍부하다는 사실이 이번 스토리 테마파크를 통해 가시화했다.【서울=뉴시스신동립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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