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립 뉴시스 문화부장

   
 
마르크스는 더 이상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이론적 공산주의를 대체할 만한 실천도 없다. 그렇다고 법정 스님의 허언을 따르자니, 수양이 부족하다.

“차지하거나 얻을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할 때 우리는 가난해진다. 그러나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한다면 실제로 소유한 것이 적더라도 안으로 넉넉해질 수 있다. 우리가 적은 것을 바라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남들이 가진 것을 다 가지려고 하면 인생이 비참해진다”는 고승의 가르침이 우화로 들린다. 물질적 가난이 무엇인지, 알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내 편이라고 믿은 집단이 알고보니 나의 희생을 밟고 올라 선 특권층이었다는 배신과 분노의 기저에 가난이 있다. 헝그리 정신으로 성공신화를 이룩했다는, 간난신고 끝에 화려하게 비상한 미운오리새끼라는 유의 판타지가 허위라면 가난한 자들은 참지 못한다. 계층이동이 기대난망인 이땅에서 어쩌다 탄생한 용의 개천이 가짜였다니, 용서할 수 없다.

암흑의 중세로 회귀하고 있다. 어린이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던 시대다. 어린이는 어른의 세상에서 스스로 놀이와 즐거움을 찾아 손에 넣어야 했다. 작은 어른으로서 아버지가 죽으면 바로 일가의 가장이나 일족의 우두머리가 됐다. 보호 없이 약육강식의 정글로 내던져진 중세의 어린이는 삶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 때면 망아의 세계로 도피,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했다. 어린이 십자군, 에르푸트르의 어린이 무도행진 따위가 보기다. 그때 그 어린이들은 곧 현 시점의 88만원 세대다.

박석무가 정약용의 시 ‘시랑3장’(豺狼三章)을 찾아내 들려준다. ‘우리의 논밭을 바라보시게. 얼마나 지독한 참상인가요. 백성들 이리저리 떠돌다가 구덩이 속을 가득 메우네. 부모 같은 사또님이여! 고기랑 쌀밥이랑 잘도 드시며 방안에는 기생 두어 연꽃처럼 곱고 예쁘네.’ 이어 감상평을 전한다. “모순된 사회구조, 그런 양극화 현상은 언제쯤 해결될 날이 있을까요. 다산, 그의 분노가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 합니다. 오늘도 양극화의 간극은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농경 조선이 산업국가로 바뀌었어도 승냥이와 이리의 존재는 엄연하다.

잘 차려입은 남녀들이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대를 내려보면서 희희낙락하는 영상도 같은 맥락이다. 뉴욕 맨해튼 월가 은행 발코니의 이 장면은 와전이라고는 한다. 역시 잘못 알려졌다는 앙트와네트의 발언이 그래도 떠오른다. 빵을 달라, 먹을것을 달라는 민중더러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라고 했다는 전설이다.

219년 전 오늘 1월21일, 그 앙트와네트의 남편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 당했다. 인구의 2% 남짓에 불과한 제1신분 성직자, 2신분인 귀족이 국토의 절반 이상을 소유한 시절이다. 그래서 3신분인 시민들이 봉기했다. 프랑스 혁명이다.

유사 이래 그러나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미국의 상위 1% 부자는 전체소득의 20%를 챙기고 있다. 영국의 젊은이들까지 약탈을 하고 폭동을 일으키는 요즈음이다. 전쟁이 없었던 세기는 없다. 글로벌, 지구촌이므로 먼나라의 얘기 만은 아닐 것이다.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불평등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극심한 불평등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불신과 시기, 적대감은 당연하다. 에두아르도 포터는 “성장의 자극제로서 불평등의 힘은 그것이 공정하다고 인식되는가, 아니면 적어도 완전히 불합리하다고 인식되지 않는가에 달려 있다”고 파악한다.

국민소득 1만 달러의 상징은 마이카, 2만 달러는 요트라는 환상이나 주입하고 앉았을 때가 아니다. 적대감을 읽어야 한다. 본말을 전도해서는 안 된다.[신동립 뉴시스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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