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원더풀 라디오' 정유미가 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한 카페에서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여인을 보면서 가여워서 함께 울기도 했고, 너무 답답해하며 정신 차리라고 몇 대 쥐어박고 싶기까지 했다. 이 '오빠 바보'를 위해 보호본능을 일으킨 남성들도 있었다. 12월20일 막을 내린 SBS TV 드라마 '천일의 약속' 속 착하디 착한 '노향기' 얘기다.

물론 '설마 저런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던 노향기는 실재하지 않는다. 극작가 김수현(69)씨의 펜 끝에서 생명을 받은 인물이다. 대신, 이 세상에는 정유미(28)가 있다. 노향기가 없는 것은 아쉽지만 정유미가 있다는 것은 기쁨이다.

뮤직 로맨스 영화 '원더풀 라디오'의 개봉을 맞은 정유미를 서울 압구정동에서 만났다. 드라마를 마친 지 2주가 넘었으나 정유미는 아직 노향기를 떠나 보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정말 몰입해서 연기를 했기 때문일까요. 향기로부터 빠져나오기 힘들다기보다 보내기 싫은 것도 있네요. 드라마가 끝났다는 사실이 낯설고, 끝났다는 실감도 안 나요. 향기 없는 나로 돌아왔고, 앞으로 나한테 다른 인물을 입혀야 한다는 것도 믿기지 않네요."

2010년 MBC TV '동이'(극본 김이영·연출 이병훈), 지난해 영화 '너는 펫'(감독 김병곤)을 통해 간간히 모습을 보였지만 정유미의 '천일의 약속' 출연은 의외였다. 오히려 귀에 익숙한 정유미는 지난해 사회적 충격을 준 영화 '도가니'(감독 황인호)의 여주인공인 동명이인 정유미(29)였다.

"저도 오디션을 보라는 연락을 받고 놀랐어요. 아니, 두려웠어요. 김수현 선생님 작품의 오디션이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 못할 것 같았죠. 오디션 가는 것부터 겁이 났어요."

정유미가 모든 연기자의 꿈이라 할 수 있는 김씨의 작품을 두려워 했던 것은 완벽해야 하는 대사 스트레스 때문이다. "제가 '동이' 때 생긴 트라우마가 대사였어요. 대본을 급하게 받고 바로 외워서 해야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대사가 잘 안 외워지는 거에요. 원래 저는 대사 NG가 없었는데 그때부터 자꾸 대사 NG를 냈죠. '동이'를 끝낸 뒤에도 한 동안 촬영하다 NG 내는 꿈을 꿨을 정도에요. 그러다 보니 점점 자신이 없어지고 더 대사를 틀리는 악순환이 이어졌죠. 그런 제가 감히 '대사가 완벽하게 똑같아야 한다'고 들어온 김수현 선생님의 작품을 하다니요? 난 못 가, 난 못 해 하다가 되든 안 되든 가봐야 한다는 주변의 떠밀림에 오디션에 갔죠."

   
▲ 영화 '원더풀 라디오' 정유미가 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한 카페에서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당연히 안 되리라는 짐작 탓이었을까, 아무 준비하지 말고 오라는 얘기에 메이크업도 받지 않고 갔을 뿐 아니라 연출자 정을영 PD가 "너는 (향기가) 아니야", "너한테서는 향기가 나지 않아"라고 자극해도 "네, 전 아닌가 봐요"라며 편하게 답했고 부드러운 대화를 나누다 돌아왔다.

"사실 제가 왜 캐스팅됐는지 저도 몰라요. 촬영 중에도 감독님은 늘 '넌 아니다'고 말씀하셨고, 칭찬도 하지 않으셨거든요. 그저 제 생각에는 오디션 부담이 없다 보니 감독님께 꾸밈 없는 제 모습을 보여드린 것이나 연기 면에서도 꼭 이렇게 해야 한다고 준비한 게 아니어서 편하게 했던 것이 좋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어요."

솔직한 고백처럼 얼떨결에 오디션을 치렀으나 곧 모든 것을 걸게 된다. "감독님께서 전화를 하셔서 '잘해낼 수 있겠지? 믿고 맡겨 볼까 하는데…. 나의 희망이 돼주기 바란다'고 하셨어요. 그 순간 내가 너무 큰것을 하겠다고 달려든 게 아닌지 겁도 나는 한편 베테랑 선배 배우들, 좋은 감독님, 훌륭한 작가님의 작품이 검증이 안 된 저 때문에 망가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마음가짐이 연기하는데 있어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게 하지 않았나 싶네요."

노향기라는 인물은 요즘 세상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는 천사 같은 여자다. 본인의 사랑경험이 도움이 됐을까? "제가 솔직히 사랑을, 그렇게 열렬하게 퍼주는 사랑을 해본 적은 현실에서나 연기에서나 없거든요"라면서 "(김)래원 오빠와 좋았던 시절의 회상신이라도 하나 나왔다면 모르겠지만 시작할 때부터 상대는 나한테서 마음이 떠나 있고 나 혼자 모든 것을 해야 해서 감정을 잡기 쉽지 않아 힘들었죠.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대사들을 하고, 듣다 보니 감정이 막 생겨 났고, 막 아팠어요. 진짜로 그런 사랑을 한 것처럼요"라고 고백했다.

'천일의 사랑'에서 정유미가 펼친 연기는 수많은 시청자들을 사로잡았으며 이는 협찬에 까다로운 패션디자이너 지춘희(58)씨의 선택을 받는 계기가 됐다. "난생 처음 시상식(SBS 연기대상)에 참석해야 하는데 연말이라 워낙 시상식이 많아 드레스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어요. 그런데 지춘희 선생님이 전화를 주신 거에요.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드라마를 봤다. 숍에 초대할테니 마음껏 입어보고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라'고 하시더군요." 문득, 결혼 전 지춘희의 뮤즈였던 심은하(40)로의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드라마에서 얻은 정유미의 인기를 내심 반기고 있는 곳은 역시 '원더풀 라디오'다. 7일 서울 지역 무대인사에 권칠인(51) 감독, 주연배우 이민정(30), 이정진(34)과 함께 정유미를 내세웠을 정도다.

이 영화에서 정유미가 맡은 '난솔'은 '신진아'(이민정)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원더풀 라디오'의 메인작가다. 매일 방송에 앞서 신진아 앞으로 배달오는 꽃다발과 명언 쪽지의 주인공을 상상하며 '뭘 하든 향기로운 분일거야'라며 나름 로맨틱한 기분에 빠져 손발이 오글거리는 대사를 날린다. 또 회식자리에서 만취, 이후 매니저 '차대근' 역의 이광수(27)와 어우러져 보여준 '과감한' 노출신과 베드신은 노향기와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정유미의 다른 면이 드러나는 것이 흥미롭고, 바로 다시 만나는 것도 다행스럽지만, 거꾸로 이런 걱정도 든다. 그런 상반된 면면이 정유미라는 배우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을는지….

하지만 정유미는 똑소리나게 답한다. "그 동안 너무 불쌍한 노향기를 보면서 가슴 아파하시던 분들도 밝고 쾌활하며 털털한 난솔을 통해 위안도 받으실 수 있고, 즐거워 하실 수 있을 겁니다. 향기를 아껴주신 만큼 난솔이도 사랑해 주세요."/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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